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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ngHaの思い出ブログ☆彡と日常のあれこれ

② 박용하, 차압 딱지와 싸웠던 7년 눈물 세월

<酔中トーク>②パク・ヨンハ、差し押さえと戦った涙の7年間(韓国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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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토크] ② 박용하, 차압 딱지와 싸웠던 7년 눈물 세월

>> 1편에서 이어짐

▶박용하의 현재좌표=애매모호함

-두 여배우의 출연작 중 인상 깊게 본 작품은.

"윤아 누나가 출연한 '사랑을 놓치다'는 일본에서 다운로드(유료였다고 강조함;)를 통해 봤다.

노래나 영화나 일단 제목이 좋아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인데 이 영화도 제목 만큼 역시 좋았다. 정작 누나는 흥행이 저조해 속상했다지만 좋은 상대 배우(설경구;)와 연기하게 돼 많은 걸 배웠다고 하더라. 하늘씨는 워낙 히트작이 많아서. '동갑내기 과외하기' 때부터 팬이었다."

-박용하의 현재 좌표는 어디쯤인가. 그리고 이 드라마를 통해 뭘 얻고 싶은 건가.

"사실 내 위치는 애매모호함 그 자체가 아닐까. 초절정 인기를 누리다가 일본에 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본에서 기대를 밑돈 것도 아니고. 그냥 어느 순간 증발된 것 같은 느낌이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한국에서 점점 잊혀지다가 다시 기지개를 켜는 느낌? 사실 나는 굉장히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이다. 완만한 하강곡선을 다시 상승세로 끌어올리는 게 이번 미션이다. 너무 솔직했나?"

-사람들에게 바라는 박용하의 이미지는 어떤 건가.

"딱 하나다. 왠지 재밌는 사람일 것 같다는 말을 가장 듣고 싶다. '멋있을 것 같다', '훈남이다' 보다 유쾌할 것 같은 사람이란 표현이 나는 더 좋다. 오랜만의 컴백이지만 억지로 멋 부리고 싶지 않고,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 싶지도 않다."

-4년간 한국 활동을 시도한 적은 없었나.

"일본에서 발매한 앨범 작업 스케줄과 순회 공연 일정을 피하다 보니 한국 드라마나 영화 출연 모두 여의치 않았다. 부족한 내게 두마리 토끼를 잡는 건 역시 무리였다.(웃음;)"

-일본에서 박용하가 어필한 진짜 이유는 뭐라고 진단하나.

"글쎄. '겨울연가'가 대박난 후 배용준 선배에 이어 두 번째로 일본에 발을 디딘 프리미엄도 있었고, 용준 선배와 뭔가 다르게 다가가자는 전략이 적중했던 것 같다. OST를 들고 가수로 연착륙한 게 차별화 아니었을까. 어, 한국 배우가 노래도 하네? 같은 호기심도 있었을 것이고."

-혹시 스스로 과대포장되고 있다는 불안함은 없었나.

"솔직히 그게 가장 염려스러웠다. 일본에선 실력 보다 내 이름이 항상 먼저였다. 한국 대표 가수, 라이브 잘 하는 한국 가수 같은 수식어 때문에 솔직히 부담스럽고 민망했다.

그래서 인터뷰 때마다 짧은 일어로 그런 수식어를 모두 부정했다. 매번 한국엔 저 보다 실력있는 가수들이 한 트럭은 넘는다고 강조했다. 그랬더니 이번엔 겸손한 박용하라는 호칭이 붙는 거다.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첩첩산중이었다.(웃음;)"

-칭찬은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윤활유 아닌가.

"그렇긴 하지만 내가 한국 연예인의 기준점이 된다는 게 마치 대중을 속이는 것 같아 마음에 걸렸던 거다. 칭찬을 발전의 원동력이나 촉진제로 활용할 순 있겠지만 거기에 현혹되거나 자만할까봐 늘 두려웠다."

-가만, 일어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

"일본을 몇 번 오가다 보니 일어에 대한 갈증을 심하게 느꼈다. 통역이 제대로 내 생각을 전달하는지도 궁금했고, 혹시 자기들끼리 내 험담하는 건 아닌지 의심도 되고 해서 성수대교 사거리에 있는 한 어학원 아침반에 등록해 초급 단계부터 배웠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는 말 딱 맞았다. 공부가 이렇게 재미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지금은 프리토킹으로 30분 넘게 대화할 수 있는 수준이다."

▶'쩐의 전쟁' 내 얘기였다

-일본에선 숙소가 따로 있었나.

"장기 공연할 때는 세 달간 맨션을 임대해 썼지만 1주일 안팎으로 머물 땐 주로 시내 호텔을 번갈아 가며 이용했다. 사진 촬영이 유일한 취미라 일본 스태프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셔터를 눌렀다. 지하철, 버스도 실컷 탔는데 생각 만큼 알아보지 않아 불편함은 없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곳은 삿포로였다. 그리고 도쿄 시내의 록폰기에 있는 선술집도 자주 갔다."

-코리안 타운이 있는 아카사카 지역은 안 갔나.

"스스로 기특한 게 한국 여자들이 일하는 술집에 한번도 안 갔다는 사실이다. 보통 한국 연예인들이 일본 가면 필수코스처럼 들르는 곳이지만 사소한 스캔들에 휩싸이지 말자고 스스로와 약속했다. 슬롯머신도 안 했다. 전자오락 빼곤 워낙 그런 방면에 소질이 없다. 고스톱도 못 치고, 카드 게임도 할 때마다 규칙을 까먹는다. 유일한 취미가 사진과 당구(150점;)다."

-일본에서의 로맨스는 없었나.

"불행히도 없었다.(웃음;) 대신 한국에선 남들처럼 영화 보고, 술 마시고, 연애도 했다. 마지막 사귄 여자친구와는 2년 전 헤어졌고, 그 뒤로 계속 솔로신세다."

-연예인 친구 중 베스트프렌드는?

"소지섭이다. 스물 한 살 때 PC방에서 새우탕면 먹으면서 쌓은 우정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는 창천동, 지섭이는 대방동에서 30만원짜리 월셋방에 살았지만 꿈을 놓지 않았다. 앙드레 김 패션쇼에서 만나 친해졌는데 며칠 전에도 소주를 마셨다. 박광현도 호출하면 달려가는 친구다."

-보이지 않는 라이벌 의식은 없나.

"그런 건 없지만 서로 갖지 못한 부분에 대해선 대놓고 부러워한다. 일본 활동하면서 가장 인상적으로 본 작품이 '미안하다, 사랑한다'였다. 배우로서 한번 만날까 말까한 캐릭터를 지섭이가 정말 잘 소화해낸 거다.

그거 보고 지섭이한테 전화해 '임마 너 좋겠다. 지금 그 열정 변하지 말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 무렵 일본 공연 앞두고 괜한 자괴감 때문에 '난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걸까' 고민했던 적도 있다. 무대와 팬, 내 노래가 있었지만 왠지 모를 공허함을 느끼던 때였다."

그는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아버지를 꼽았다. 송창식·양희은·정수라 등 70~80년대 가수들의 매니저였던 그의 아버지는 국내 최초로 대학 공연 등 이벤트를 만든 기획자였다. 그러나 IMF 한파가 닥친 96년 아버지가 친척의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집에 차압 딱지가 붙었다. 당시 박용하의 쥐꼬리 만한 수입도 모조리 차압됐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다. 그가 막 20대가 되던 해였다.

-그때부터 혼자 살게 된 건가.

"본의 아니게 독립하게 됐고, 그뒤로 아버지가 여러 번 재기를 노렸지만 번번이 허사였다. 결국 신용불량자가 되셨고, 누나도 대학원 공부를 그만둬야 했다. 하루 아침에 낙오자가 된 아버지의 뒷모습이 왜 그렇게 쓸쓸해 보이던지. 액수를 밝히긴 그렇지만 보증보험 회사와 7년 넘게 채권 채무 관계에 시달리다가 일본 진출하기 직전인 2003년 원리금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드라마 '쩐의 전쟁'이 예사롭지 않았겠다.

"그 드라마 보면서 옛날 우리집 생각 많이 났다. 사채업자 마동포(이원종;) 때문에 고생하는 주인공들을 보면서 응원 많이 했다.(웃음;) 채권, 추심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든다."